일한 시간은 같습니다
값은 다를 수 있습니다
범이가 위촉장을 들고 나타났다. 스스로 붙인 직책은 ‘노동시간 가치평가위원장’이었다.
범이
시간이라고 다 같은 시간은 아닙니다.
웅녀
한 시간은 60분 아니야?
범이
물리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웅녀
행정학적으로는?
범이
예산에 따라 조금 짧아질 수 있습니다.
범이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자기가 하는 말이 정말 합리적인 행정이라고 믿는 얼굴이었다.
낮 12시에 일한 60분과, 퇴근하고 나서 더 일한 60분을 생각해 보자. 둘 다 그 사람 인생에서 똑같이 사라진 60분이다.
그런데 국가는 이 60분을 평가할 때 여러 산식과 기준을 동원한다. 여기서 자연스러운 질문 하나가 남는다.
얼마짜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바뀌는 제도, 그런데도 남는 질문
최근 변화가 있었다. 인사혁신처와 행정안전부는 지난 7월 21일, 하루 4시간까지만 인정되던 공무원 시간외근무 상한을 폐지하는 방향의 규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오는 10월 1일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업무가 몰려 하루 4시간을 넘게 일해도 초과분은 수당 계산에서 잘렸는데, 앞으로는 그 잘리던 시간까지 추가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긴급 상황에서 적용되던 월 100시간 상한도 함께 폐지되는 방향이다. 다만 평상시 월 57시간 상한은 그대로 유지된다.
정부도 기존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고 손을 대기 시작한 셈이다. 여기까지는 분명 다행스러운 변화다.
그런데 하루에 몇 시간을 초과근무로 인정하느냐는 ‘시간의 양’에 관한 문제다.
그 한 시간을 얼마로 계산하느냐는 ‘시간의 값’에 관한 문제다. 이 둘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재 제도에서는 정규근무가 끝난 뒤 처음 1시간은 그날의 시간외근무 실적으로 따로 계산되지 않는다.
정부는 월 정액분과 업무 준비시간 등을 고려한 구조라고 설명한다. 이번에 폐지되는 건 하루 4시간 상한이지, 이 첫 1시간 공제 구조는 그대로 남는다.
하지만 실제로 그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일한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질문이 남는다.
범이가 여기서 신기술을 소개했다.
범이
이걸 ‘시간 증발 장치’라고 부릅니다.
웅녀
그거 그냥 계산에서 빼는 거잖아.
범이
과학적으로 들리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헌신이라는 이름의 화폐
범이가 곧이어 새 정책을 발표했다. 이름하여 《공무원 시간 가치 차등제》.
범이
모든 시간을 같은 값으로 평가하면 예산이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래서 범이는 시간을 등급으로 나눴다.
퇴근 후 → 헌신 시간
늦은 밤 → 국가사랑 시간
긴급업무 → 애국 시간
각 등급에는 새 수당도 붙었다. 보람수당, 헌신수당, 애국포인트, 국민감사 마일리지.
웅녀
그래서 돈은?
범이
명칭으로 충분히 보상했습니다.
웅녀
통장에는?
범이
마음에 입금됩니다.
사명감이 일을 시작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사명감만으로 노동의 값을 대신할 수 있는지는 다른 질문이다.
공무원과 민간근로자는 적용되는 법과 보수체계가 애초에 다르다. 그렇다면 그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차이가 언제나 합리적이라는 결론은 같은 말일까.
답을 미리 정해두지 않더라도, 한 번쯤 다시 물어볼 가치는 있는 질문이다.
의자를 바꾸기 전에
후반부, 범이는 청년 공무원 이탈 문제에 손을 댔다.
범이
젊은 직원이 떠난다고 합니다.
웅녀
왜 그런지 알아봤어?
범이
회의실 의자를 파스텔톤으로 바꾸겠습니다.
웅녀
그 의자에서 야근하는 사람 얘기부터 들어봐.
물론 청년들이 공직을 떠나는 이유가 초과근무수당 하나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보수, 승진 전망, 민원 부담, 업무 강도, 조직문화까지 여러 요인이 얽혀 있다. 다만 조직문화 개선만으로 이 문제를 다 설명할 수 있는지는 별개다.
노동조건과 보상을 함께 보지 않은 채 의자 색깔부터 바꾸는 건, 문제의 절반만 보는 방식일 수 있다.
범이가 최종 보고서를 내놓았다. 제목은 《청년 공무원 만족도 향상 종합대책》.
범이
초과근무를 줄이지 못할 경우,
초과근무라는 이름을 ‘자발적 국가기여시간’으로 변경합니다.
웅녀
이름 바꾼다고 퇴근 시간이 돌아와?
범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보고서 맨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범이
검토 예정.
직업이 달라도,
그 시간 동안 사라지는 삶의 길이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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