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태료 모바일 고지에서 디지털화폐까지
실물은 정말 사라져도 될까?
범이가 새 완장을 찼다. 이름하여 ‘종이절감 숲관리소장’.
계기는 얼마 전 뉴스 하나였다. 경찰청이 교통 과태료 고지서를 휴대전화로 알려주는 모바일 고지 방식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우편함에 쌓인 고지서를 놓쳐 기한을 넘기는 사람을 줄이고, QR코드로 위반 영상을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다.
종이고지서를 당장 전부 없앤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범이는 그 뒷부분을 읽지 않았다.
범이
종이는 나무에서 나옵니다. 오늘부터 종이를 없애겠습니다.
웅녀가 정정하려 했지만, 범이는 이미 빈 상자를 챙겨 들고 나선 뒤였다.
그날 오후 범이는 프린터 용지함부터 비우기 시작했다.
이면지, 영수증, 달력, 사은품 다이어리까지 종이라는 종이는 죄다 상자에 쓸어 담았다.
고지서 한 장을 상자에 넣으려던 손이 잠깐 멈췄다.
그 한 장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종이를 만드는 사람, 인쇄하는 사람, 봉투를 만드는 사람, 우편물을 분류하고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다.
디지털 고지가 자리를 잡으면 이런 일들의 물량과 형태도 바뀔 수 있다.
그렇다고 당장 모두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변화 과정에서 무엇이 달라지는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범이는 다시 상자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지갑이었다.
범이
이것도 종이잖아.
웅녀가 다급히 지갑을 붙잡았다.
종이 다음은 돈이었다
범이의 다음 목표는 화폐 자체였다.
마침 한국은행이 디지털화폐 관련 실험을 진행하고 있고, 은행의 예금을 디지털 형태의 예금토큰으로 만들어 실제 결제에 사용해보는 실증도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대한민국이 현금을 없애고 디지털화폐로 전면 교체하기로 했다는 뜻은 아니다.
범이
최신 기술이 왔으니 옛 기술은 퇴직시키겠습니다.
웅녀가 지폐 한 장을 빛에 비춰보였다.
숨은 그림과 미세문자, 여러 보안 요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 들여다보던 범이가 멈췄다.
범이
……옛날 기술인데 왜 이렇게 바쁩니까.
동전 하나가 빵이 되기까지
지폐도 그냥 종이가 아니다.
인쇄 기술과 위조방지 기술, 도안 디자인이 겹겹이 쌓인 결과물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 도안과 물건 자체가 그 시대를 보여주는 기록이 되기도 한다.
경주의 십원빵도 그런 예다.
10원 동전이라는 실물이 있었기에 그 모양과 기억을 활용한 새로운 관광상품도 만들어질 수 있었다.
범이
현금을 다 없앴으면 이 빵은 무슨 모양이었을까요?
웅녀
디지털 숫자 10?
범이
그건 그냥 화면이잖아요.
버스토큰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예전에는 버스를 타려면 토큰을 샀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토큰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과자와 우유, 간식도 그렇다.
실물을 보면 그 시절 학교와 소풍, 친구와 가족, 당시 가격과 생활방식까지 함께 떠오르기도 한다.
실물은 물건 하나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생활을 같이 남기기도 한다.
정전이 나던 날
그날 저녁 범이는 또 다른 일을 몸으로 겪었다.
건물에 정전이 났고 통신도 함께 끊겼다.
저녁을 사 먹으려던 범이가 휴대전화를 흔들었다.
범이
디지털로 계산하겠습니다.
웅녀
통신 안 돼.
범이가 잠시 버티다 물었다.
범이
그럼… 복구될 때까지 외상?
웅녀가 주머니에서 꼬깃한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금융시스템에는 여러 단계의 백업과 복구 체계가 있다.
그렇다고 정전이나 통신장애, 결제망 오류가 생긴 순간에도 모든 결제수단을 언제나 곧바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잠깐을 버틸 다른 수단 하나쯤 남겨두는 것도 사회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병행이라는 선택
사실 모바일 고지 자체는 반가운 변화에 가깝다.
우편함을 확인하지 못해 납부기한을 놓치는 일을 줄일 수 있고, 위반 내용을 더 빨리 확인할 수도 있다.
행정 비용과 종이 사용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다만 스마트폰 사용이 낯선 사람도 있고, 휴대전화 번호가 바뀌거나 디지털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모바일 고지를 확대하더라도 공공기관이 보낸 것인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본인인증과 공식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질문은 조금 달라진다.
모바일을 추가하는 것과
종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같은 문제일까?
정전이 복구된 뒤, 범이는 걷어갔던 종이와 지폐를 다시 꺼냈다.
다만 완전히 반성한 얼굴은 아니었다.
범이
이건 비상용 숲 훼손 허용량으로 남겨두겠습니다.
고지서 양식 몇 장도 서랍 한 칸에 따로 챙겨 넣었다.
범이
종이는 멸종위기종처럼 보호구역에서만 사용합니다.
웅녀
그래. 그 정도면 됐어.
범이는 마지막으로 남겨둔 지폐 한 장에 작은 스티커를 붙였다.
비상용 아날로그 결제수단
웅녀가 한숨을 쉬었다.
※ 이 글은 실제 정책과 공개자료를 바탕으로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구성한 풍자 콘텐츠입니다. 범이와 웅녀의 행동과 대화는 이해를 돕기 위한 가상 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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