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어느 날.
주막 앞에 범이가 나타났다. 막걸리를 두어 잔 걸친 범이는 밖에 세워둔 마차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삐를 잡았다.
그때 포졸 하나가 앞을 막아섰다.
“잠깐 서시오!”
범이가 자신만만하게 돌아봤다.
“뭔 일이래유?”
포졸이 물었다.
“술을 마셨소?”
“두어 잔밖에 안 먹었슈.”
“그런데 마차를 몰려고 하오?”
범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내가 가는 게 아니쥬.”
“그럼 누가 가오?”
“말이 가는 겨.”
포졸이 잠시 범이를 쳐다본다.
범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집이 바로 저 고개 너머여유.”
“내가 이 길을 몇 년을 다녔는디.”
“천천히 갈 겨.”
“말이 길을 다 알아유.”
그리고 결정적인 한마디.
“나는 술 먹었어도 말은 한 방울도 안 먹었슈.”
포졸이 잠시 말이 없다. 그러다 묻는다.
“그래도 고삐는 누가 잡고 있소?”
범이가 자기 손을 내려다본다.
정적.
“……내가 잡고 있쥬.”
고삐에서 핸들로.
시간이 흘러 몇백 년이 지났다. 말과 마차는 자동차가 됐고, 포졸은 경찰이 됐다. 고삐는 핸들이 됐다.
그런데 핑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두 잔밖에 안 마셨어요.”
“집이 바로 앞이에요.”
“저 술 셉니다.”
“이 정도면 다 깼어요.”
“천천히 갈게요.”
범이가 그 모습을 보다가 한마디 한다.
“탈것은 바뀌었는디… 핑계는 오래도 가네유.”
나도 밤에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였다.
그냥 그날 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고 있었을 뿐이다.
사고는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의 시간은 그렇게 짧게 끝나지 않았다.
뉴스에서 음주운전 사고를 다룰 때 관심은 대개 여기에 쏠린다. 징역 몇 년, 벌금 얼마, 면허취소. 가해자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그런데 피해자의 시간은 그 뒤로도 계속된다.
치료가 이어질 수 있고, 예전처럼 몸을 쓰기 어려워질 수도 있고, 일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보상을 둘러싸고 보험회사나 가해자 측과 오래 다퉈야 하는 시간도 따라온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12년째 이어지고 있다.
가해자의 형사재판에는 언젠가 끝이 온다. 하지만 피해자의 치료와 보상 문제는 그보다 훨씬 오래 이어질 수도 있다.
가해자가 받은 형벌의 기간과, 피해자가 사고를 안고 살아가는 시간은 같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그 차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 길을 지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삶의 방향이 달라졌을 뿐이다.
범이가 이번에는 장난스럽게 굴지 않는다.
범이: “음주운전 위험한 거 모르는 사람이 있어유?”
웅녀: “거의 다 알겠지.”
범이: “걸리면 처벌받는 것도 알고?”
웅녀: “알지.”
범이: “사람 다칠 수도 있다는 것도?”
웅녀: “그것도 알지.”
범이가 잠시 말이 없다.
“근디… 다 아는디… 왜 음주운전은 안 줄어드는 겨?”
범이가 다시 입을 연다.
범이: “조선시대 마차 갖다 놓고 웃었는디 말여.”
웅녀: “응.”
범이: “몇백 년 지나서 자동차까지 만들었잖여.”
웅녀: “그렇지.”
범이가 잠시 생각한다.
“근디 술 마시고 ‘나는 괜찮다’는 생각은 왜 그대로인 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