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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가 익는 동안 사람의 마음도 익어 갔다|길 위의 만물상 제10회

이 콘텐츠는 제작 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았으며, 운영자가 내용을 검토·수정하여 게시하였습니다.

길 위의 만물상 · 제10회

익어 가는 것은 김치만이 아니었다

김장을 마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연화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김장 날 북적이던 게 거짓말 같았다. 박 할머니네 마당은 깨끗해졌다. 고무대야도 치워졌다. 빨간 양념 자국도 물로 씻겨 나갔다. 마당에 햇볕만 들었다. 겨울 햇볕이라 옅었다.

겨울이 깊어 가고 있었다. 아침마다 서리가 내렸다. 마당이며 지붕이며 하얗게 앉았다. 산은 잎을 다 떨군 채 헐벗었다. 바람이 불면 마른 가지가 서로 부딪쳐 달그락거렸다. 마을은 고요했다. 사람들이 추워서 밖에 잘 안 나왔다. 가끔 굴뚝에서 연기만 올랐다. 겨울 마을은 그렇게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겨울 햇살 아래 조용히 숨 쉬는 연화마을 풍경

그런데 집집마다, 김치독 속에서 김치가 익어 가고 있었다. 처마 밑 항아리 속에서, 김치냉장고 속에서. 보이지 않게, 소리 없이. 갓 담갔을 땐 풋내가 나던 김치가, 하루하루 익어 갔다. 양념이 배추 속까지 배어들고, 국물이 시원해지고, 맛이 깊어졌다. 항아리 뚜껑을 열면, 익어 가는 냄새가 알싸하게 올라왔다. 시간이 김치를 익히는 거였다. 사람 손이 다 한 게 아니었다. 담그고 나면, 나머지는 시간이 했다.

마을은 조용한데, 김치는 익어 갔다.

겨울 속에서 조용히 익어 가는 김치 항아리와 김치 한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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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는 평소처럼 물건을 배달했다. 김장이 끝났어도 일상은 돌아갔다.

두부 사고, 계란 사고, 산을 넘고. 진우의 하루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가는 집마다 김치 얘기를 했다.

“강 양반, 김치 맛이 들었어. 한번 먹어 봐.”

박 할머니가 갓 익은 김치를 한 점 줬다. 진우가 받아 먹었다. 일주일 전보다 맛이 깊어져 있었다. 풋내가 가시고, 시원한 맛이 돌았다.

“잘 익었네요.”

“이제 시작이여. 더 익으면 더 맛있어. 설 지나면 아주 깊은 맛이 나.”

다른 집에서도 그랬다.

“올해 김치는 더 잘 익겠어. 날이 추워서. 추울 때 담근 김치가 천천히 익어서 맛있어.”

가는 집마다 김치 자랑이었다. 일주일 전 같이 담근 김치가, 집집마다 익어 가고 있었다. 진우는 그 얘기를 들으며 웃었다. 같은 날 담근 김치인데,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게 익었다. 항아리가 다르고, 두는 자리가 다르고, 그래서 맛도 조금씩 달랐다. 그래도 다들 잘 익어 갔다.

박 할머니가 진우에게 잘 익은 김치 한 점을 건네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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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이 할머니도, 그 김치를 먹었다.

아침이었다. 할머니가 작은 밥상에 앉았다.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그리고 김치. 일주일 전 진우가 가져다준 김치였다. 할머니가 김치를 한 점 집어 밥에 올렸다. 천천히 씹었다.

일주일이 지나니, 김치가 더 익어 있었다. 시원하고 깊은 맛이 났다.

할머니가 김치를 씹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밥상은 여전히 혼자였다. 마주 앉은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보다 덜 외로웠다. 그 김치를 먹을 때마다, 김장날 마을 사람들이 떠올랐다. 박 할머니가 자기를 위해 좋은 포기로 골라 담아 준 게 떠올랐다. 진우가 그걸 가져다준 게 떠올랐다. 혼자 먹는 밥상인데, 그 김치 덕에 마음은 덜 혼자였다.

할머니는 김치를 한 점 더 먹었다. 천천히. 창밖으로 겨울 햇살이 들었다. 마루가 조용했다. 그래도 그 조용함이, 전처럼 쓸쓸하지만은 않았다.

혼자 앉아 김치를 먹으며 덜 외로운 마음을 느끼는 이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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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에 어르신들이 모였다.

겨울이라 평상에 오래 앉아 있진 못했다. 그래도 햇볕 좋은 한낮엔 잠깐씩 모였다. 진우가 장사하는 동안, 어르신들이 김치 얘기를 했다.

진우가 두부를 담다 물었다.

“근데 김치는 왜 시간이 지나야 맛있어져요? 갓 담근 것도 맛있는데.”

최병수가 받았다.

“맞어. 갓 담근 것도 맛있지. 겉절이처럼.”

박 할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다른 맛이지. 갓 담근 건 갓 담근 맛이고, 익은 건 익은 맛이여. 둘이 달러. 겉절이는 상큼하고, 익은 김치는 깊고. 어느 게 더 낫고가 아니라, 그냥 다른 맛이여.”

정 영감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급하면 안 되는 겨. 김치는.”

정 영감이 항아리 쪽을 봤다.

“담가 놓고 기다려야 혀. 빨리 익으라고 들쑤시면 안 돼. 가만 놔둬야 지대로 익어. 시간이 알아서 익히거든. 사람이 할 일은 담그는 것까지여. 나머지는 시간이 햐.”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사람도 그런가요?”

평상이 잠깐 조용해졌다.

정 영감이 진우를 봤다.

“사람도 시간이 필요혀.”

“금방 친구가 안 되고, 금방 가족도 안 돼. 처음 보면 서먹하지. 그러다 자꾸 보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일하고. 그렇게 시간이 쌓여야 정이 들어. 김치 익듯이. 사람 정도 익는 거여. 하루아침에 안 돼.”

진우는 그 말을 들으며 손을 멈췄다. 생각해 보면, 진우도 그랬다.

처음 연화마을에 왔을 땐, 다들 서먹했다. 진우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라, 물건만 팔고 휙 가곤 했다. 어르신들도 낯선 장사꾼을 데면데면 대했다. 처음엔 외상도 안 줬다. 믿을 만한 사람인지 몰라서. 진우도 그냥 물건 파는 마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또 한 번. 산을 넘어 오다 보니, 조금씩 달라졌다. 진우가 전구를 갈아 주고, 무거운 걸 들어 주고. 어르신들이 삶은 감자를 쥐여 주고, 김치를 담가 주고. 그렇게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다. 외상도 트고, 안부도 묻고. 이제는 어르신들이 진우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진우도 누구네는 뭘 좋아하는지, 누구네는 뭘 못 먹는지 다 외웠다.

그게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었다. 몇 해를 오가며, 천천히 익은 거였다. 김치가 익듯이. 처음엔 풋내 나던 사이가, 시간이 지나며 깊어진 거였다.

평상에 모인 어르신들과 진우가 김치와 사람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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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영감이 차를 마시다 말했다.

“옛날부터 그랬어. 착한 마음은 누구한테나 있다고.”

정 영감은 누구 말이라고 안 했다. 그냥 옛날부터 그랬다고만 했다.

“갓난애도 착한 마음은 있어. 누가 가르쳐 줘서가 아니라, 사람은 원래 그런 마음을 타고나는 거여. 남이 아파하면 안됐고, 남이 어려우면 돕고 싶고. 그게 사람 마음이여.”

정 영감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근디 그 마음을 끝까지 지키는 게 어려운 겨. 마음이야 다 있지. 근디 살다 보면 그 마음이 닳아. 바빠서, 힘들어서, 내 살기 바빠서. 처음 마음을 오래 지키는 사람이 드물어. 김치도 그려. 담그는 건 누구나 햐. 근디 잘 익도록 끝까지 정성 들이는 게 어려운 거여.”

정 영감은 그 말을 하고 더 안 늘렸다. 입맛을 다시고 차를 마셨다. 진우는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처음 마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 진우는 그걸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음 손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당 한쪽에서 작은 소동이 났다.

서윤이와 서아가 뭔가를 보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서. 갈범이도 거기 있었다. 진우가 가 봤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참새였다. 날개를 다친 모양이었다. 푸드덕거리다 못 날고, 땅에서 파닥였다.

갈범이가 그 옆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갈범이는 고양이였다. 새를 보면 덮치는 게 고양이였다. 그런데 갈범이는 가만히 있었다. 새를 덮치지 않았다. 짖지도 않았다. 그냥 곁에 앉아서, 새를 지켜봤다. 마치 지키는 것처럼.

“갈범아, 새 안 잡아?”

서아가 신기해서 물었다. 갈범이는 새를 한 번 보고, 서아를 한 번 보고, 그냥 앉아 있었다.

“잡으면 안 돼. 다쳤잖아.”

서윤이가 말했다. 서윤이가 조심스럽게 새를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하게.

서아가 옆에서 거들었다. 두 아이가 새를 안전한 데로 옮겼다. 처마 밑 상자에. 풀을 깔고, 물을 떠다 놓고. 날개가 나으면 날아가게.

정 영감이 그걸 보고 조용히 웃었다.

“사람만 마음이 있는 건 아닌가 보네.”

갈범이가 상자 옆에 앉았다. 새를 지키듯이. 아이들이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겨울 햇살이 그 위로 비쳤다. 다친 새 한 마리에, 고양이도 아이들도 마음을 쓰고 있었다. 착한 마음은 사람한테만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다친 참새를 보살피는 아이들과 그 곁을 지키는 갈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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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됐다. 진우가 장사를 마치고 떠날 채비를 했다.

물건을 짐칸에 싣고, 천막을 접었다. 어르신들이 김치를 한 통 챙겨 줬다. 잘 익은 거로. 진우도 집에서 그 김치를 먹을 거였다.

진우가 운전석에 올랐다. 산길로 들어섰다.

내리막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또 늦게 섰다. 페달이 깊이 들어가고, 차가 한 박자 늦게 섰다. 진우는 두 번 나눠 밟았다. 지난번처럼 거의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밀렸다. 진우는 그 느낌을 알았다. 언제 또 지난번처럼 될지 몰랐다.

진우는 산 아래 정비소 쪽을 봤다.

마을에서 내려가면, 읍내에 정비소가 있었다. 거기 가면 됐다. 며칠 미루고 미룬 거였다. 이제는 정말 가야 했다. 진우가 혼잣말을 했다.

“이번 주에는 꼭 고치자.”

이번엔 정말 그럴 작정이었다. 김장도 끝났겠다, 더 미룰 이유도 없었다. 이번 주 안에 날을 잡아서, 최병수랑 같이 정비소에 가기로. 진우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는 단골 손님이었다. 옆 마을 사는 사람이었다.

“진우 씨. 미안한데, 급한 물건 하나만 갖다줄 수 있어? 애 분유가 떨어졌는데, 차가 없어서. 가게까지 나갈 수가 없네.”

진우는 잠깐 말이 없었다.

분유였다. 아기 분유. 떨어지면 안 되는 거였다. 그 집은 차가 없고, 가게는 멀고. 진우 아니면 갖다줄 사람이 없었다.

“……알았어요. 지금 갈게요.”

진우가 전화를 끊었다. 정비소는 산 아래 읍내였고, 그 집은 옆 마을이었다. 방향이 달랐다. 옆 마을부터 다녀오면, 오늘 정비소는 못 갔다. 또 미뤄지는 거였다.

진우는 잠깐 정비소 쪽을 봤다. 그러고는 핸들을 돌렸다. 옆 마을 쪽으로. 분유부터 갖다주고, 정비소는 다음에. 또 다음으로 미뤄졌다.

진우는 그게 위험한 걸 알았다. 브레이크가 밀리는 차로, 또 산을 넘는 거였다. 그런데 아기 분유가 급했다. 진우는 자기 차를 고치는 것보다, 그 집 아기 분유가 먼저였다. 진우는 늘 그랬다. 자기 일은 뒤로 미루고, 남의 급한 일을 먼저 했다.

희망호가 옆 마을로 향했다. 브레이크가 밀리는 채로. 정비소를 또 지나쳐서.

갈림길에서 정비소 대신 옆 마을로 향하기로 선택하는 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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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졌다.

연화마을 굴뚝마다 연기가 올랐다. 저녁 짓는 연기였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밥상이 차려졌다. 그 밥상마다, 잘 익은 김치가 올랐다.

어떤 집은 웃으며 먹었다. 자식이 왔거나, 손주가 왔거나. 김치에 고기를 싸 먹으며 웃음소리가 났다. 어떤 집은 조용히 먹었다. 노부부 둘이 마주 앉아, 말없이. 그래도 그 조용함이 편안했다. 어떤 집은 혼자 먹었다. 혼자 사는 이 할머니처럼. 그래도 김치 덕에 덜 외로웠다. 어떤 집은 둘이 먹었다. 젊은 부부가 아이랑.

다 다른 밥상이었다. 웃는 집, 조용한 집, 혼자인 집, 둘인 집. 그런데 그 밥상마다 같은 김치가 올랐다. 같은 마을에서, 같은 날, 같이 담근 김치였다. 한 솥에서 나온 정이, 집집마다 나뉘어 익어 가고 있었다.

김치는 익어 갔다.

처음엔 풋내가 나던 김치가, 시간이 지나며 깊은 맛이 됐다. 사람도 그랬다. 처음엔 서먹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며 정이 들었다. 진우와 마을이 그랬고, 도시서 온 서아와 시골 아이 서윤이가 그랬고, 다친 새와 갈범이가 그랬다. 시간이 김치를 익히듯, 시간이 사람 마음도 익혔다.

김치는 시간이 지나며 익어 갔고,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며 조금씩 익어 가고 있었다.

— 길 위의 만물상 제10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