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만물상》 제18회
희망호가 없는 하루
최병수가 경운기를 몰고 천천히 산길을 내려갔다.
엔진은 거칠게 울렸고, 밧줄에 묶인 빈 상자들은 덜컹거렸다. 주머니에 넣은 주문표가 바람에 날릴까 봐 최병수는 자꾸 손으로 눌러 확인했다.
내리막에서 속도가 조금 붙자 최병수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희망호는 이 길을 맨날 다녔단 말이지.”
혼잣말처럼 짧게 중얼거렸다.
· · ·
읍내 가게에 도착한 최병수는 주문표를 펼쳐 두부부터 살폈다.
두부 두 모를 번갈아 들어 봤다. 겉으로 봐서는 어느 것이 부드러운지 알 수 없었다.
“이게 더 부드러운 겁니까?”
가게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병수는 주문표의 ‘박 할머니’ 옆에 동그라미를 쳤다.
식용유 앞에서는 큰 통을 먼저 집어 들었다. 그러다 이 할머니가 큰 통은 들기 어렵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도로 내려놓고 작은 통으로 바꿨다.
기저귀 매대 앞에서는 오래 서 있었다. 종류와 크기가 너무 많았다.
“중형이 이 중형이여, 저 중형이여.”
이것저것 뒤집어 봐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젊은 부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정확한 제품과 크기를 알려 주었다. 최병수는 진열대를 몇 번이나 오가며 같은 포장을 찾았다.
· · ·
약국에서는 더 막혔다.
약사는 이 할머니가 가져온 빈 약봉지를 살펴보고, 언제부터 불편했는지 물었다. 최병수는 아는 만큼만 대답했다. 약사가 몇 가지를 다시 확인한 뒤에야 약을 봉투에 담았다.
몸이 불편한 노부부의 혈압약은 이미 처방되어 준비된 것을 대신 찾아가는 것이었다. 약사가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최병수가 주문표를 펼쳐 봤다. 거기에는 ‘김 할아버지 약’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여럿이었다.
최병수는 박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름을 확인했다.
· · ·
경운기 짐칸에 물건들이 실렸다. 두부 상자, 식용유, 기저귀, 약봉지, 작은 생필품들이 서로 섞이지 않게 정리됐다.
굽은 길을 돌 때마다 두부 상자가 한쪽으로 밀렸다. 최병수는 경운기를 세우고 밧줄을 다시 당겼다. 약봉지는 비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식용유와 기저귀가 눌리지 않도록 상자 위치도 몇 번 바꿨다.
빈 상자만 싣고 내려올 때보다 길이 더 길게 느껴졌다.
경운기가 천천히 산길을 올랐다. 오르막에서 엔진 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최병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 · ·
경운기 소리가 들리자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서윤이가 먼저 달려왔다.
“병수호 온다!”
최병수가 민망하지만 조금 자랑스러운 얼굴로 공터에 들어왔다.
박 할머니가 짐칸을 보며 물었다.
“다 사 왔어?”
“사 오기는 했는디, 뭐가 뭔지 다시 봐야 혀.”
사람들이 평상에 물건을 펼쳐 놓고 집별로 나누기 시작했다.
박 할머니가 두부를 보고 말했다.
“이거 내 거 맞어. 부드러운 거네.”
최병수가 그제야 안도했다. 같은 물건이 여러 집에 있어 헷갈리자, 서윤이가 주문표 옆에 집 이름을 다시 적었다.
갈범이가 비닐봉지 냄새를 맡다가 박 할머니에게 살짝 밀려났다.
· · ·
물건을 나누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봉수 할아버지와 최병수, 서윤이가 집집마다 배달을 나섰다.
이 할머니는 큰 봉지를 들기 어려워했다. 최병수가 부엌 안쪽까지 물건을 가져다 놓았다.
“강 양반은 여기까지 갖다 놓고 갔는디.”
최병수는 아무 말 없이 봉지를 더 안쪽으로 옮겼다. 문턱에 걸리지 않게 들어 올려, 이 할머니 손이 닿기 쉬운 자리에 내려놓았다.
젊은 부부 집은 비어 있었다. 서윤이가 기저귀를 처마 안쪽에 놓고, 종이에 짧게 메모를 남겼다.
노부부 집에는 약과 두부를 가져다줬다. 집 안이 어두웠다. 전구가 나간 지 며칠 됐지만, 갈아 줄 사람이 없어 그냥 지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괜찮어. 낮에는 보이니까.”
최병수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 · ·
최병수는 마을로 돌아가 봉수 할아버지를 불렀다. 봉수는 자기 집 창고에서 사다리와 새 전구를 챙겨 왔다.
노부부 집으로 다시 간 최병수는 사다리를 붙잡았고, 봉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구를 갈아 끼웠다.
불이 켜졌다.
벽에 걸린 오래된 달력과 장롱 위 사진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가 눈을 조금 찡그렸다. 할아버지는 천장을 보고, 다시 할머니 얼굴을 봤다.
“아이고, 환하네.”
봉수가 짧게 대답했다.
“전구 하나였어요.”
· · ·
배달을 마친 사람들이 평상에 모였다.
최병수는 허리를 두드렸다. 박 할머니는 남은 주문표를 접었다. 봉수 할아버지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서윤이는 빈 상자를 차곡차곡 포갰다. 정 영감은 차를 마시며 말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다들 지쳐 있었다.
최병수가 말했다.
“강 양반은 이걸 매주 혼자 했구먼.”
정 영감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혼자 한 줄도 몰랐지.”
잠깐 아무도 말이 없었다.
· · ·
박 할머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우였다.
“약은 다 받으셨어요? 기저귀도요?”
박 할머니가 주문표를 내려다봤다.
“다 했어. 걱정 말고 차부터 제대로 고쳐.”
진우가 잠시 뒤에 말했다.
“다음 장날도 못 갈 수 있어요.”
박 할머니가 대답했다.
“우리가 해 볼게. 오늘도 했잖여.”
진우는 잠깐 말이 없었다.
“네.”
· · ·
전화를 끊은 뒤 마을 사람들은 다음 주문표를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조금 익숙했다.
박 할머니가 물건을 말하고, 정 영감이 빠진 것을 확인했다. 서윤이가 글씨를 반듯하게 적었다. 최병수는 옆에서 경운기 열쇠를 손가락에 걸고 있었다.
진우의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그 자리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길 위의 만물상》 제18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