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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부터 노인일까? 나이보다 먼저 늙는 것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 길 위의 만물상 11회

이 콘텐츠는 제작 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았으며, 운영자가 내용을 검토·수정하여 게시하였습니다.
길 위의 만물상
제11회
사람은 언제부터 노인일까
겨울 햇살 아래 연화마을

겨울 아침이었다.

진우가 희망호를 몰고 산을 넘었다. 길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진우는 천천히 갔다. 차 안에 라디오가 흐르고 있었다. 아침 뉴스였다.

“……노인 연령 기준을 조정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현재 예순다섯 살인 기준을……”

진우는 그 말을 끝까지 못 들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단골 손님이었다. 두부하고 콩나물 좀 갖다 달라고.

진우가 통화를 하느라, 라디오 소리를 줄였다. 뉴스는 그대로 흘러가다 끊겼다. 노인 나이를 올린다는 둥, 연금이 어떻다는 둥. 요즘 그런 뉴스가 자주 나왔다.

진우는 통화를 마치고, 라디오를 아예 껐다.

산 너머 마을은, 그 뉴스에 나오는 노인들이 사는 곳이었다.

희망호가 겨울 산길을 오르는 모습
· · ·

연화마을 평상에 어르신들이 모였다.

겨울이라도 햇볕 좋은 한낮엔 잠깐씩 나와 앉았다. 정 영감, 박 할머니, 최병수. 진우는 그 옆에서 물건을 풀었다. 양지바른 평상에 겨울 햇살이 따뜻했다.

겨울 햇살 아래 평상에서 두부와 유자차를 나누는 사람들

진우가 두부를 꺼내며 말했다.

“뉴스에서 노인 나이를 올린다고 하던데요. 예순다섯에서 더 올린다고.”

최병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인? 누가 노인이여. 난 아직 젊은디?”

평상에 있던 사람들이 웃었다. 최병수가 제일 젊긴 했다. 그래도 환갑이 가까웠다. 그런데 본인은 한사코 젊다고 했다.

박 할머니도 웃으며 거들었다.

“나도 마음은 아직 스무 살이여. 몸이 안 따라 줘서 그렇지. 거울 보면 깜짝깜짝 놀라. 저 할망구가 누군가 하고.”

웃음이 퍼졌다. 박 할머니가 자기 얼굴을 만지며 웃었다. 다들 그랬다.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만 늙었다고. 거울 속 얼굴이 낯설다고.

· · ·

진우가 두부를 건네며 물었다.

“근데 사람은 언제부터 노인이에요? 나이로 정하는 게 맞나.”

평상이 잠깐 잠잠해졌다. 저마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정 영감이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박 할머니가 겨울이라고 끓여 온 거였다. 노란 차에서 김이 올랐다.

“글쎄. 나이 숫자만으로 되는 건 아닌 것 같여.”

“그럼요?”

진우가 물었다. 정 영감이 잠깐 뜸을 들였다.

“꿈을 포기하면, 그때부터 늙는 겨.”

한동안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진우가 정 영감을 봤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안 늙어. 내년엔 뭘 해야지, 봄엔 뭘 심어야지, 그런 게 있으면 젊은 거여. 근디 아무것도 안 바라고,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면, 그게 늙은 거지. 나이가 적어도 그러면 노인이여.”

정 영감이 먼 산을 봤다.

“몸이 늙는 건 어쩔 수 없어. 그건 해가 가면 다 늙어. 근디 마음이 늙는 건, 자기가 정하는 거여. 마음까지 늙을지 말지는.”

유자차를 들고 겨울 산을 바라보는 정 영감
· · ·

박 할머니가 무릎을 탁 쳤다.

“맞는 말이여. 나는 아직도 내년 김장 생각을 햐. 올해 김치 익는 거 보면서, 내년엔 더 잘 담가야지 하고. 그 생각 하면 안 늙어.”

최병수가 무릎을 쳤다.

“나는 벌써 봄에 밭 갈 생각부터 햐. 올겨울 지나면 뭘 심을까. 고추를 심을까, 콩을 심을까. 그 생각 하면 겨울도 금방 가.”

진우가 웃었다. 다들 늙었다면서도, 머릿속엔 내년 계획이 가득했다. 김장이며 밭이며. 봄에 뭘 심고, 가을에 뭘 거두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음 농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이 어르신들이 안 늙는 이유였다.

· · ·

정 영감이 식은 유자차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옛날부터 그랬어.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거라고.”

정 영감은 누구 말이라고 안 했다. 그냥 옛날부터 그랬다고만 했다.

“나이를 먹어도 배우기를 멈추면 안 된다 했어. 새로운 걸 배우고, 모르던 걸 알아 가고. 그게 사람 사는 거여. 늙었다고 다 안다고 하면, 그때부터 늙는 거지. 나도 아직 모르는 게 많어. 자네들한테 배우는 것도 있고.”

정 영감이 진우를 봤다.

“강 양반한테도 배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거, 강 양반이 알려 주잖여. 늙은이가 젊은 사람한테 배우는 게 흉이 아니여. 배우는 동안은 안 늙는 거니까.”

정 영감은 거기서 말을 그쳤다. 더 보태지 않았다. 좋은 말도 길어지면 잔소리가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진우는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 배우는 동안은 안 늙는다는 것. 진우는 그 말을 속으로만 곱씹으며, 두부를 마저 건넸다.

· · ·

장사를 마치고, 진우가 다음 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혼자 사는 이 할머니 집 앞을 지나는데, 할머니가 마당에서 끙끙대고 있었다. 장작을 옮기는 중이었다.

처마 밑에 쌓아 둔 장작을, 아궁이 쪽으로 나르고 있었다. 한 아름씩. 무릎이 안 좋은데도, 혼자 하고 있었다.

진우가 차를 세우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제가 할게요.”

“아이고, 강 양반. 됐어. 내가 햐.”

할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진우가 장작을 받아 들었다. 한 아름 번쩍 들어서 아궁이 쪽으로 옮겼다. 할머니가 옆에서 그걸 봤다.

“늙었다고 다 못 하는 건 아니여. 나 아직 이 정도는 햐.”

할머니가 자존심 상한 듯 말했다. 진우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못난이 취급받는 건 싫었던 모양이다. 아직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알아요. 할머니 정정하신 거. 그냥 지나가다 보여서요.”

진우와 이 할머니가 나란히 장작을 옮기는 모습

진우가 장작을 마저 옮겼다. 할머니도 다시 한 아름 들었다.

둘이 같이 옮기니, 금방 끝났다. 할머니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웃었다.

“……그래도 둘이 하면 더 좋긴 햐.”

진우도 웃었다. 할머니는 혼자 할 수 있다고 했지만, 둘이 하니 더 빨랐다.

도움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같이 하면 좋다는 뜻이었다. 그 둘은 달랐다.

· · ·

평상으로 돌아오니, 어르신들 얘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까 그 노인 뉴스 얘기였다. 최병수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하긴, 연금도 필요하고 복지도 필요하지. 늙으면 벌이가 없으니까. 나라에서 좀 도와줘야 혀.”

박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다, 한마디 보탰다.

“그것도 필요한디, 그보다 더 필요한 건 사람이여. 돈만 있고 곁에 아무도 없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여. 아파도 들여다볼 사람이 없는데.”

정 영감이 유자차 잔을 내려놨다.

“맞어. 돈은 생활을 도와주지만, 외로움까지 가져가진 못 햐.”

연화마을 평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잠시 말이 끊겼다. 다들 그 말을 곱씹는 얼굴이었다.

연금이 나와도, 복지가 좋아져도, 혼자 사는 외로움은 그게 못 채웠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어도, 곁에 앉아 줄 사람은 못 샀다.

어르신들은 그걸 알았다. 평생을 살아오며 몸으로 깨친 이치였다.

진우는 그 말을 들으며 물건을 정리했다. 혼자 사는 이 할머니가 떠올랐다. 장작을 같이 옮길 때 웃던 얼굴이.

돈보다 사람이라는 말이, 진우 마음에 남았다.

· · ·

오후가 됐다.

진우가 산길을 내려왔다.

내리막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심스럽게.

페달이 깊이 들어가고, 차가 한 박자 늦게 섰다. 또 밀렸다.

진우는 두 번 나눠 밟았다. 발끝에 신경이 가 있었다.

산을 다 내려오니, 읍내였다.

읍내 어귀에 정비소가 있었다. 파란 간판. 진우가 그 간판을 봤다.

그동안 몇 번이고 그냥 지나친 간판이었다. 이번 주엔 꼭 가자고 하고도, 매번 미뤄 온 터였다. 분유 배달이며 급한 일이며, 핑계는 늘 있었다.

이번엔 진우가 깜빡이를 켰다.

차를 정비소 앞으로 붙였다. 천천히. 브레이크를 일찍 밟아서, 겨우 세웠다.

진우가 시동을 끄지 않고 잠깐 앉아 있었다. 드디어 온 것이다. 더는 안 미루고.

정비소 앞 희망호에서 전화를 확인하는 진우

정비사가 사무실에서 나왔다.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진우가 차창을 내렸다. 브레이크가 밀린다고, 말하려고 입을 뗐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 · ·

진우가 화면을 봤다.

연화마을이었다. 박 할머니 번호. 방금 헤어진 마을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진우가 받았다.

“네, 할머니.”

“강 양반!”

박 할머니 목소리가 다급했다. 평소 같지 않았다.

“강 양반, 큰일 났어. 이 할머니가……”

진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비사가 그걸 보고 멈칫했다.

“이 할머니가 쓰러졌어. 아까 장작 옮기다 무리했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119 불렀는데, 이 산골까지 오려면 한참 걸린다고. 강 양반, 차 있잖여. 강 양반이 좀…….”

진우는 이미 기어를 넣고 있었다.

“지금 갈게요. 바로 갈게요.”

진우가 전화를 끊었다. 정비사가 뭐라 말하려는데, 진우가 차창 밖으로 짧게 말했다.

“죄송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다음에 올게요.”

“아니, 잠깐…….”

정비사의 말이 끝나기 전에, 희망호가 출발했다.

진우는 핸들을 돌려 정비소를 빠져나왔다. 다시 산 쪽으로. 방금 내려온 그 산길을, 다시 올라가야 했다.

브레이크가 밀리는 차로. 사람을 태우러.

정비소 간판이 사이드미러에서 멀어졌다. 또 그냥 지나쳐 버린 간판이었다.

· · ·

희망호가 산길을 올랐다.

진우는 액셀을 밟았다. 평소보다 급하게. 엔진이 거칠게 떨었다.

드르륵—.

진우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쓰러졌다. 빨리 가야 했다. 차가 떨든 말든.

오르막을 넘고, 내리막이 나왔다.

진우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급하게.

페달이 푹 들어갔다. 차가 안 섰다.

진우의 등에 식은땀이 났다. 다시 밟았다. 또 안 들었다. 차가 그대로 미끄러졌다.

굽어진 겨울 산길을 달리는 희망호

진우는 핸들을 꽉 잡았다.

급한 마음에 평소보다 빨리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들었다. 내리막은 길고, 차는 점점 빨라졌다.

진우는 브레이크를 펌프질하듯 밟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래도 차는 잘 안 섰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사람을 태우러 가는 길이었다. 쓰러진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그런데 그 차가, 지금 말을 안 들었다.

진우는 핸들을 두 손으로 꽉 쥐고, 굽잇길을 돌았다.

겨우, 차가 속도를 줄였다.

다음 평지에서, 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이 떨렸다.

이 차로는 안 됐다. 진우도 알았다. 진작 고쳤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차밖에 없었다.

진우는 다시 액셀을 밟았다. 쓰러진 할머니가 기다렸다.

진우는 그 위험한 차로, 산을 올랐다.

· · ·

진우가 마을에 도착했다.

박 할머니네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 할머니가 마루에 누워 있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얼굴이 하얬다.

박 할머니가 곁에서 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진우가 차를 마당 앞에 바짝 댔다.

“할머니, 제가 병원 모셔다드릴게요.”

진우가 이 할머니를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최병수가 반대쪽을 부축했다.

둘이 할머니를 희망호 조수석에 태웠다. 할머니가 끙, 하고 신음했다. 진우가 담요로 할머니를 덮어 줬다.

“꽉 잡으세요. 천천히 갈게요.”

진우가 다시 산길을 내려갔다. 이번엔 사람을 태웠다.

브레이크가 밀리는 차에, 아픈 사람을 태우고.

아픈 이 할머니를 태우고 조심스럽게 산길을 내려가는 진우

진우는 아까보다 더 조심해서 몰았다. 한 발은 늘 브레이크 위에.

굽잇길마다 한참 전에 속도를 줄이고, 살살.

식은땀이 흘렀다. 옆에 사람이 탔으니, 더 조심해야 했다.

진우 혼자면 모를까, 아픈 할머니가 옆에 있었다.

진우는 기다시피 산을 내려갔다. 평소의 곱절은 걸렸다.

그래도 무사히 읍내까지 갔다. 병원 앞에 차를 대고, 할머니를 부축해 응급실로 들였다.

· · ·

해가 기울 무렵, 마을은 조용했다.

이 할머니는 다행히 큰일은 아니라고 했다. 무리해서 잠깐 쓰러진 거라고. 며칠 쉬면 괜찮다고.

진우가 병원에 할머니를 맡기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땐 저녁이었다.

마을이 한바탕 놀란 뒤라, 다들 집으로 들어갔다. 평상엔 정 영감만 남아 있었다.

정 영감이 평상에 앉아, 겨울 산을 보고 있었다.

해가 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산이 붉었다가, 천천히 어둑해졌다.

정 영감은 한참 그 산을 봤다. 오늘 하루를 생각하는지.

정 영감이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나이는 해가 먹는 거고…….”

“사람은, 마음이 먹는 겨.”

바람이 한 번 불었다. 마른 가지가 달그락거렸다.

정 영감은 한참 더 앉아 있었다. 산이 다 어두워질 때까지.

이 할머니는 오늘 쓰러졌다. 몸은 늙었고, 무릎은 아팠다. 그래도 혼자 장작을 옮기려 했다. 아직 자기 손으로 살려고.

그게 그 할머니가 안 늙은 증거였다. 몸은 쓰러져도, 마음은 아직 살아 있으려 했다.

진우는 오늘 정비소를 또 못 갔다. 사람이 먼저라서. 자기 차보다, 쓰러진 할머니가 먼저라서.

진우는 그 위험한 차로 또 산을 넘었다. 누군가를 위해.

진우도 그래서 안 늙는 사람이었다.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아직 살아 있어서.

겨울 산을 바라보는 연화마을의 노인

사람은 태어나는 날보다,
누군가를 포기하는 날 더 늙어 가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