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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년 만에 열린 오래된 나무상자, 고향의 기억이 돌아왔다

이 콘텐츠는 제작 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았으며, 운영자가 내용을 검토·수정하여 게시하였습니다.
《길 위의 만물상》
제14회
오래된 나무상자
햇살이 드는 방 안 오래된 나무상자 앞에 모인 사람들

아침이 왔다.

빈집 마당으로 햇살이 들었다. 어제까지 차갑던 공기가 조금 더 풀려 있었다. 감나무 가지에서 새소리가 났다.

어젯밤 들어온 새가 거기서 잔 모양이었다.

진우가 마당에 들어섰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나와 있었다. 감나무를 보고 있었다. 뒷모습이었다.

진우는 말을 걸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왔어요.”

“짐 마저 내려 드리러 왔어요.”

“고맙소.”

할아버지가 짐 쪽으로 걸어갔다. 서두르지 않았다. 오십 년 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박 할머니도 왔다. 정 영감도 왔다. 최병수도 나왔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몰랐다. 그냥 다들 나온 거였다. 연화마을이 원래 그랬다. 새 사람이 이사 오면, 묻지 않아도 손이 모였다.

진우가 무거운 박스를 들고, 최병수가 짐을 날랐다.

박 할머니가 부엌에서 할머니와 같이 그릇을 정리했다. 정 영감은 마당에서 마루에 앉아 그 모습을 봤다.

둥굴레차를 박 할머니가 챙겨 줬다. 차 빛이 옅었다. 봄에 잘 맞는 차였다.

오십 년 만에 돌아온 고향집에 짐을 들이는 아침
· · ·

짐을 다 정리할 무렵이었다.

창고 한쪽에 두었던 나무상자를 방으로 들이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직접 들었다.

진우가 도우려 하자 손을 내저었다. 그 상자는 본인이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방 한쪽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할아버지가 쪼그려 앉았다.

뚜껑을 잡았다.

잠깐 그대로 있었다. 할머니가 옆에 앉았다.

뚜껑이 열렸다.

오래된 나무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여는 봉수

먼지가 올라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먼지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방 앞으로 모였다. 아무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는데.

상자 안에 물건들이 있었다.

맨 위에 흑백사진 몇 장이 있었다. 사람들이 서 있는 사진이었다. 종이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 아래에 편지 몇 장. 봉투가 노랗게 바래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사진도 있었다. 줄 맞춰 선 아이들이었는데, 맨 끝 아이 얼굴이 흐릿했다.

낡은 공책도 있었다. 표지가 닳았다. 누군가 연필로 이름을 써 놨는데 지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 손때 묻은 나무팽이가 있었다. 실이 감겨 있었다. 실이 끊어진 채로.

구슬이 몇 알. 빨간 것, 파란 것, 초록 것. 오래됐는데 빛은 살아 있었다.

작은 새총도 있었다. 나뭇가지를 Y자로 구부려 만든 거였다. 고무줄이 삭아 있었다.

그리고 연필 한 자루. 몸통에 누군가 이름을 새겨 놨다. 글씨가 작았다.

박 할머니가 연필을 집어봤다.

“이름을 새겨 놨네.”

“학교 다닐 때 연필 도둑이 많았어요. 이름 안 써 놓으면 없어졌거든요.”

할아버지가 나무팽이를 꺼냈다. 손바닥에 올려봤다.

손이 기억하는 것처럼, 팽이를 돌릴 때의 자세로 잠깐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구슬을 꺼냈다. 햇살 쪽으로 들어봤다. 빨간 구슬 안에서 빛이 번졌다.

“이걸 아직도 갖고 있었구나.”

혼잣말이었다.

나무상자 속 흑백사진과 구슬, 팽이, 새총과 오래된 물건들
· · ·

흑백사진을 꺼냈다.

아이들이 나무 아래 서 있는 사진이었다. 배경에 집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사진을 보며 말했다.

“이 나무가 저 감나무예요. 이 집 마당 감나무.”

박 할머니가 사진을 받아봤다.

“어이구. 저 나무가 이렇게 작았네.”

할아버지가 사진 속 아이를 짚었다.

“나예요. 여기. 맨 끝.”

눈을 찡그리고 서 있는 작은 아이였다.

“감을 따다가 떨어진 날 찍은 거예요. 다리에 피가 나는데 사진부터 찍는다고 해서.”

다들 웃었다.

할아버지가 사진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름이면 친구들이랑 개울에서 멱을 감던 일. 물고기를 잡으려고 돌을 쌓았는데 한 마리도 안 잡혔던 일.

겨울이면 개울이 얼어서 썰매를 탔다. 신발 밑에 쇠붙이를 달았는데 잘 안 미끄러져서, 그냥 엉덩이로 밀고 내려갔다.

“학교 끝나면 저 골목에서 뛰었어요. 가방이 무거워도 뛰었어요. 빨리 집에 오고 싶어서.”

박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나도 그랬어. 집에 오면 뭔가 있을 것 같아서.”

“있기는요. 밥밖에 없었지.”

할아버지가 웃었다.

“그래도 그 밥이 좋았어요.”

박 할머니가 졸업사진을 봤다.

“이 선생님이 누구예요?”

“담임 선생님이요.”

“젊으시네.”

“그때는 젊었죠.”

박 할머니가 사진 속 선생님을 봤다. 키가 작았다.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이들 앞에 서 있었다.

“좋은 선생님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잠깐 생각했다.

“엄했어요. 근데 따뜻했어요. 그런 선생님이 있잖아요. 무서운데 보고 싶은.”

박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그런 선생님.”

최병수가 사진을 봤다.

“여기 다 어디 갔어요. 이 친구들.”

“다 서울 갔죠. 나처럼.”

할아버지가 사진을 내려놓았다.

“그게 그 시절 거였어요. 다 떠나는 거였어요. 남는 게 더 이상한 시절이었어요.”

· · ·

정 영감이 사진 한 장을 받아봤다.

한참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사진 속 한 아이를 짚었다.

“이 사람이 장 서방 아버지 아녀?”

할아버지가 정 영감을 봤다.

“장 서방을 알아요?”

“오래전에 이 마을 살던 사람이여. 우리 어릴 때.”

할아버지가 정 영감 얼굴을 봤다. 한참 봤다.

백발이 하얬다. 얼굴에 주름이 많았다.

“……혹시 영섭이?”

정 영감이 할아버지를 봤다.

“봉수냐.”

할아버지가 웃었다.

“오십 년 만이에요.”

오래된 사진을 사이에 두고 오십 년 만에 서로를 알아본 봉수와 정 영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다들 둘을 봤다.

정 영감이 할아버지를 봤다. 할아버지가 정 영감을 봤다.

둘 다 백발이었다.

그 사이 시간이 어디 있었는지 모를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정 영감이 둥굴레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눈가를 창문 쪽으로 돌렸다. 감나무가 보이는 쪽이었다.

“이래서 왔구나.”

“네. 왔어요.”

· · ·

할아버지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오래된 편지였다.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편지지가 노랗게 바래 있었다. 글씨는 선명했다. 꼼꼼한 글씨였다.

할아버지가 천천히 읽었다. 혼자 읽었다.

한참 읽다가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박 할머니가 물었다.

“누가 쓴 편지예요?”

“담임 선생님이요.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가 편지를 한 번 접었다가 다시 폈다.

마지막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살든,
자기 고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거라.”
누렇게 바랜 담임선생님의 편지를 읽는 봉수

마당이 조용했다. 그 한 줄이 방 안에 걸렸다.

할아버지가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말이 없었다.

할머니가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우는 그 모습을 봤다.

사람은 물건을 버리는 게 아니라 기억을 보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그냥 상자를 봤다.

· · ·

갈범이가 방 문 앞에서 상자 냄새를 맡았다.

코를 킁킁거렸다.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새총을 발로 건드렸다. 새총이 굴러갔다.

할아버지가 갈범이를 봤다.

“이 마을 고양이예요?”

“마을 고양이예요.”

진우가 말했다.

“오래됐어요?”

“꽤 됐어요.”

할아버지가 갈범이를 한 번 봤다.

“이놈도 여기 있었겠네.”

갈범이는 굴러간 새총을 발로 또 건드렸다.

서윤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몰랐다.

흑백사진을 들고 이리 보고 저리 봤다.

“왜 사진이 까매요?”

다들 웃었다. 정 영감이 제일 크게 웃었다.

박 할머니가 서윤이한테 설명했다. 옛날에는 사진이 다 저랬다고. 색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고.

서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색이 없으면 슬프지 않아요?”

박 할머니가 잠깐 생각했다.

“그때는 그게 다 있는 거여. 없다는 걸 몰랐으니까.”

서윤이가 그 말을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후가 됐다.

짐 정리가 끝났다. 마당이 조금 달라 보였다.

박스가 사라지고, 창고 문이 닫혔다.

부엌에 그릇이 들어갔다. 방에 짐이 들어갔다.

사람이 사는 집이 됐다.

할아버지가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감나무 아래에 섰다. 올려다봤다. 새눈이 돋은 가지 끝을.

그러더니 삐뚤어진 평상으로 갔다.

다리를 보고, 아래를 보고, 손으로 눌러봤다.

흔들렸다.

할아버지가 창고에서 공구를 갖고 나왔다. 최병수가 옆에 왔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 정도는 혼자 해요.”

최병수가 물러섰다. 그래도 옆에 있었다.

할아버지가 평상 다리를 고쳤다. 못을 박고, 조이고.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이 익은 사람이었다.

평상이 반듯해졌다. 할아버지가 손으로 흔들어봤다.

안 흔들렸다.

할머니가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한쪽에 앉았다. 할머니가 다른 쪽에 앉았다.

둘이 나란히 앉았다.

삐뚤어진 채로 몇 해를 있던 평상이, 이제 반듯해졌다.

감나무 아래로 봄 햇살이 비쳤다.

정 영감이 마당 입구에서 그 모습을 봤다. 말없이 봤다.

오십 년 전 여기서 같이 감나무에 올랐던 아이가, 백발이 되어 저 평상에 앉아 있었다.

정 영감이 조용히 웃었다.

세월은 사람을 늙게 만들었지만, 고향은 그 사람을 다시 아이로 만들고 있었다.

· · ·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상자 안을 다시 정리하는데, 맨 아래에 공책 하나가 더 있었다.

박스에 눌려 있던 거였다.

할아버지가 꺼냈다.

표지가 낡았다. 손으로 먼지를 쓸었다.

표지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연화국민학교 6학년 일기.

할아버지 글씨였다. 어릴 때 글씨였다. 삐뚤삐뚤했다.

할아버지가 표지를 봤다. 한참 봤다.

그러더니 첫 장을 넘기려고 손을 댔다.

잠깐 멈췄다.

오십 년 동안 한 번도 안 열었던 공책이었다.

그 안에 뭐가 적혀 있는지, 할아버지는 기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잊은 것 같기도 했다.

오래된 나무상자 맨 아래에서 발견한 낡은 일기장을 바라보는 봉수

할아버지가 첫 장을 넘겼다.

그 안을 봤다.

얼굴이 굳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된 나무상자와 흑백사진

《길 위의 만물상》 제14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