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공책을 든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방 한쪽에 쪼그려 앉은 채로.
손이 첫 장 위에 있었다. 그 이상 넘기지 않았다. 창문으로 저녁 햇살이 비쳤다. 먼지가 빛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박 할머니가 물었다.
“뭐가 있어요?”
할아버지가 대답하지 않았다.
공책을 천천히 닫았다. 그러고는 그 공책을 나무상자 안에 다시 넣었다.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닫았다.
“오늘은 됐어요.”
사람들이 돌아갔다.
박 할머니가 돌아가고, 최병수가 돌아가고, 서윤이도 돌아갔다. 진우도 희망호에 올랐다.
마당에 정 영감만 남아 있었다. 대문 앞에 서서,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마루에 나왔다. 둘이 잠깐 봤다.
“들어올라우?”
정 영감이 말했다.
“아니여. 그냥 가야지.”
정 영감이 돌아섰다. 그러다 멈췄다.
“봉수야.”
할아버지가 정 영감을 봤다.
“내일 얘기해.”
그 말만 하고 정 영감이 걸어갔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정 영감의 뒷모습을 봤다. 백발이 어둠 속에서 희었다.
감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봄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진우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정 영감이 벌써 마당에 있었다.
평상에 앉아서 쑥차를 마시고 있었다. 박 할머니가 끓여 준 거였다. 쑥 냄새가 마당에 났다. 봄 냄새였다.
할아버지가 마루에 나와 있었다. 나무상자를 들고.
둘이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할아버지가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공책을 꺼냈다.
정 영감이 그걸 봤다.
“그게 뭔지 알아.”
할아버지가 정 영감을 봤다.
“네가 쓰던 거잖여. 6학년 때.”
할아버지가 공책을 잠깐 봤다. 그러고는 첫 장을 폈다.
진우는 멀찍이 서 있었다. 가까이 가지 않았다.
첫 장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1975년 3월 22일.
오십 년 전이었다. 글씨가 삐뚤삐뚤했다. 아이 글씨였다. 그런데 힘이 있었다. 눌러 쓴 글씨였다.
할아버지가 읽기 시작했다.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눈으로만 읽었다.
정 영감이 옆에서 그걸 봤다.
“읽어봐.”
할아버지가 정 영감을 봤다.
“소리 내어. 들어야겠어.”
할아버지가 잠깐 있다가, 천천히 읽었다.
오늘 내가 이 마을을 떠난다.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간다.
영섭이는 남는다고 했다.
영섭이가 울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울었다.
나도 울었는데 안 보이게 했다.
내가 없어도 감나무는 그대로일 것이다.
평상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람이 없어도 그대로 있다는 게,
오늘은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할아버지가 거기서 잠깐 멈췄다.
정 영감이 쑥차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기억해?”
할아버지가 물었다.
“기억하지.”
정 영감이 마당을 봤다.
“아침에 학교 가는 척하고 나왔잖여. 배웅하러.”
“알았어. 오는 거.”
“알고 왔지.”
정 영감이 감나무를 봤다.
“저 나무 아래서 봤잖여.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영섭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정 영감이 고개를 저었다.
“기억 안 나.”
“다음 여름에 오면 감 따자고 했어. 그해 감이 많이 달렸거든.”
정 영감이 감나무를 한참 봤다.
“왔어야 했는데.”
“오려고 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공책을 봤다.
“서울이 그렇게 됐어.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오십 년이 갔어.”
마당이 조용했다. 진우는 희망호에 기댄 채 그 모습을 봤다.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일기를 더 읽었다.
소리 내어. 영섭이한테.
영섭이는 꼭 공부해서 선생님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서울 가서 돈 벌어서 꼭 돌아온다고 했다.
둘 다 지켰는지 모르겠다.
정 영감이 픽 웃었다.
“선생님은 못 됐지. 농사꾼이 됐지.”
“돈도 못 벌었어. 그냥 평범하게 살았어.”
할아버지가 공책을 덮었다.
“오기는 왔어. 늦었지만.”
정 영감이 할아버지를 봤다.
“늦은 거 아니여.”
그 말이 마당에 걸렸다. 쑥 냄새가 바람에 실려 갔다. 감나무 잎이 흔들렸다.
진우는 그걸 봤다.
오십 년을 기다린 사람과, 오십 년 만에 돌아온 사람이 평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침묵이 비어 있지 않았다.
오십 년의 시간이 그 침묵 안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 못한 말들, 지키지 못한 약속들, 그래도 결국 돌아온 것.
그게 다 그 침묵 안에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점심이 됐다.
할머니가 부엌에서 밥을 지었다. 연기가 굴뚝에서 올라갔다.
박 할머니가 어디서 알았는지 반찬을 들고 왔다. 최병수가 막걸리 한 통을 들고 왔다.
그냥 모인 거였다. 아무도 약속을 안 했는데.
정 영감이 막걸리를 한 잔 받아들고 할아버지를 봤다.
“한 잔 해.”
“낮부터요?”
“낮이면 어때.”
다들 웃었다. 할아버지도 웃었다.
오십 년 만에 웃는 얼굴이, 어린 시절 그 아이 얼굴이랑 조금 닮아 있었다.
정 영감이 그걸 알아챘다. 모른 척했다.
진우도 한 잔 받았다. 희망호 옆에 서서 마셨다.
감나무 아래 평상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비어 있던 평상이 가득 찼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진우는 생각했다.
돌아온다는 건,
어떤 날짜가 아니라 어떤 마음이었다.
사람이 어느 날 마음을 먹으면, 오십 년이 지나도 돌아올 수 있었다.
저녁이 됐다.
진우가 희망호에 올라 마을을 내려갔다.
내리막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페달이 깊이 들어갔다. 차가 한 박자 늦게 섰다.
진우는 두 번 나눠 밟았다.
읍내 정비소 간판이 보였다. 불이 켜져 있었다.
진우가 속도를 줄였다.
이번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차를 정비소 앞에 세웠다.
정비사가 나왔다.
“어서 오세요.”
“브레이크가 밀려요. 좀 봐 주실 수 있어요?”
“차 들여올게요.”
희망호가 정비소 안으로 들어갔다.
진우는 밖에서 기다렸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별이 하나씩 나왔다.
오늘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늦은 거 아니여.
정 영감이 했던 말이었다.
진우는 그 말을 들으며 하늘을 봤다.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하면 되는 거였다.
《길 위의 만물상》 제15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