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는 빵빵대고 앞은 안 보이는디,
그냥 가도 되는 겨?

비가 한바탕 지나간 저녁이었다. 골목은 번들번들 젖어 있었고, 물웅덩이마다 가로등이 제 얼굴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범이는 헬멧을 눌러쓰고 골목 끝 하늘을 바라봤다. 먹구름이 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비가 또 쏟아지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따, 비 또 쏟아지기 전에 얼른 가야겄다.
웅녀가 뒤에서 안전모 끈을 당기며 말했다.

비구름 말고 앞을 봐.
앞은 보고 있지.
하늘만 보고 있잖아.
범이는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말싸움은 이길 수 있어도 비구름은 이길 수 없는 법이여.
비상등만 켜면 잠깐 합법 되는 겨?
그런데 골목 모퉁이를 돌자 더 대단한 선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용차 한 대가 인도 절반과 도로 절반을 사이좋게 나눠 차지한 채 비상등만 깜빡이고 있었다.
차주는 보이지 않았다. 불법 주차 차량이라는 것이 원래 그랬다. 세워 놓을 때는 당당하다가 책임질 순간이 되면 영락없이 주인이 사라지는 신기한 재주를 부렸다.
비상등만 켜면 불법 주차도 잠깐 합법 되는 겨?
차주 마음속에서는 그런가 보지.

범이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모퉁이 너머는 코빼기도 안 보였는디, 차가 없어 보이니 그런 줄만 알았다.
차도 없구먼, 그냥 가면 안 되는 겨?
안 보이는 거랑 없는 거는 다르잖아.
범이는 입을 삐죽였지만 손은 슬그머니 브레이크 레버 위로 올라갔다. 그때 도로 한가운데, 물웅덩이 옆에 상자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겉면에는 큼지막하게 ‘취급주의’라고 적혀 있었다.
취급주의는 상자가 아니라 사람인디
범이는 상자를 슬쩍 피해 그대로 지나가려 했다. 웅녀가 범이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떨어뜨린 것도 아닌디, 왜 내가 치워야 혀?
누가 버렸는지 찾다가 누가 먼저 다치면?
그라믄 신고만 하면 되지.
신고할 수 있으면 하고, 안전하게 옮길 수 있으면 옮기고. 모른 척 지나가는 것보다는 낫잖아.
상자는 취급주의라는디, 저 상자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더 취급주의여.

그때 뒤차가 ‘빵―’ 하고 경적을 눌러댔다. 앞도 안 보이는디 일단 가고 보라는 뜻인지, 자기 급한 사정을 온 골목에 방송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뒤에서 빵빵대잖여. 저 사람도 급한가 보지.
급한 사람은 많아도 두 목숨으로 다니는 사람은 없잖아.
뒤차는 다시 한번 경적을 울렸다. 두 번 누르면 앞의 상자가 사라지고 불법 주차 차량이 투명해지는 새 기능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사실 도로 위에는 안 급한 사람이 없었다. 범이는 비를 피하고 싶어 급하고, 뒤차는 퇴근이 급하고, 저 멀리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는 저녁밥이 급했다. 다들 그렇게 급해 놓고 나중에 사고가 나면 제일 먼저 묻는 말은 똑같았다. “왜 조금 더 조심하지 않았느냐.” 급할 땐 아무도 그 질문을 미리 자기한테 하지 않는 법이여.
공 하나가 굴러 나왔다
범이가 핸들을 살짝 돌려 출발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불법 주차 차량 뒤에서 공 하나가 도로 위로 굴러 나왔다.

범이의 손이 브레이크를 잡았다.
그다음, 공을 쫓아 뛰어나오는 아이가 보였다.
오토바이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아이는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뒤따라온 보호자가 급히 달려와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무 일도 없음’이, 방금까지는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계속 경적을 울리던 뒤차도 조용해졌다. 경적도 위험을 제 눈으로 보고 나니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사고가 안 난 게 아니라
범이와 웅녀는 주변 차량을 살핀 뒤 상자를 통행에 방해되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크기가 크지 않아 직접 옮길 수 있었지만, 무겁거나 위험한 물건이었다면 무리하게 처리하지 않고 경찰이나 도로관리기관에 신고하는 게 맞았을 것이다.
사고가 안 났으니께 다행이긴 한디…….
그냥 안 난 게 아니라, 네가 멈춰서 막은 걸 수도 있지.
조금 늦었어도, 더 큰일은 막았네.
범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오토바이를 다시 출발시켰다. 이번에는 초록불이 들어와도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좌우를 한 번 더 살폈다.
도로교통법 제1조
“이 법은 도로에서 일어나는 교통상의 모든 위험과 장해를 방지하고 제거하여 안전하고 원활한 교통을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

쉽게 말하면 사고가 터지고 나서 ‘누가 잘못했나’만 따지자는 법이 아니란 뜻이다. 위험한 것이 보이면 미리 줄이고, 길을 가리는 것이 있으면 치우거나 신고하고, 사람이 튀어나올 만한 곳에서는 먼저 속도를 줄이라는 것이다.
원활한 교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액셀을 밟아 길이 빨리 뚫리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나지 않아 아무도 길 위에 멈춰 서지 않는 것이 진짜 원활한 교통일 수 있다. 모두가 10초씩 빨리 가겠다고 덤비다가 사고로 두 시간을 막는다면, 그것을 원활한 교통이라고 하기는 거시기하다.

❓ 오늘 내용 확인 퀴즈!
도로 위에 큰 상자가 떨어져 차량 통행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가장 적절한 행동은 무엇일까요?
① 내가 떨어뜨린 물건이 아니므로 그냥 지나간다.
② 뒤차가 재촉하므로 속도를 높여 상자를 피한다.
③ 위험하더라도 무조건 도로 가운데로 들어가 직접 치운다.
④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으면 옮기고, 어렵거나 위험하면 경찰이나 도로관리기관에 신고한다.
도로 위 장애물은 차량과 보행자 모두에게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교통량이 많거나 물건이 무겁고 위험하다면 무리하게 직접 치워서는 안 됩니다. 안전한 곳에서 경찰이나 도로관리기관에 신고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정답이 ④번인 건 알겄는디, 상자 주인은 벌점 없나?
일단 사람부터 안 다치게 하고, 궁금한 건 그다음에 물어봐.
안전한 도로는 모두가 실수하지 않는 곳이 아니었다.
누군가 실수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멈출 수 있는 곳이었다.
생각해 볼 질문
- 내가 버리지 않은 물건이 도로 위에 떨어져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뒤차가 경적을 울려도 앞이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그냥 출발해야 할까?
- 교통법규만 지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안전한 운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누군가 먼저 멈춰 선 하루였는지도 모른다.